
어제 저녁 넷플릭스를 켜고 무심코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2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영화 <굿뉴스>를 봤거든요. 136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이거 극장에서 봤으면 진짜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먼저 들더라고요. 1970년 실제로 일어났던 일본 항공 납치 사건을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작품인데, 변성현 감독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연출과 설경구-홍경-류승범의 앙상블이 정말 강렬했습니다.
실화를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과감한 시도
굿뉴스는 1970년 일본에서 일어난 '요도호 사건'을 모티브로 합니다.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일본 적군파 조직이 비행기를 납치해 평양으로 향하는데, 이 과정을 한국 중앙정보부가 낚아채려는 작전을 펼친다는 게 골자죠. 사실 이 소재만 놓고 보면 굉장히 무거운 첩보 스릴러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변성현 감독은 이걸 블랙코미디로 가져갔어요. 처음엔 솔직히 좀 의아했습니다. '실화 기반인데 이렇게 가벼워도 되나?' 싶었거든요. 근데 막상 보니까 그 톤이 영화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더라고요. 납치범들이 승객들 담배를 다 걷어서 '공산주의식 분배'를 한다며 똑같이 나눠주는데, 한 승객이 "나는 세 갑을 뺏겼는데 왜 이것만 주냐"고 항의하니까 "이게 공산주의다"라고 답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더니 납치범들끼리 뭔가 결정을 내릴 때 다수결로 하려다가 대장이 갑자기 "다수결은 민주주의다. 공산주의는 만장일치로 간다"며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버리죠.
한국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엔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다가 갑자기 "우리는 민주주의니까 다수결로 하자"며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중대한 결정을 마치 점심 메뉴 고르듯 투표로 처리하는 장면에서는 씁쓸한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게 블랙코미디구나, 싶었어요.
변성현 감독이 하고 싶은 걸 다 한 영화
저는 변성현 감독의 전작들을 꽤 재밌게 봤는데, 특히 <불한당>과 <킹메이커>에서 보여준 스타일리시한 연출이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굿뉴스는 정말 감독이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은 거 다 했구나' 싶더라고요.
영화 중반에 나오는 서부극 연출이 그 백미였습니다. 갑자기 화면이 황야의 무법자처럼 바뀌면서 대치 상황을 서부극 스타일로 보여주는데, 이게 전혀 뜬금없지 않고 현재 상황과 자연스럽게 맞물리더라고요. 달이 시계로 바뀌는 장면도 그렇고, 중간중간 관객에게 말을 거는 듯한 연출도 있었는데 과하다는 느낌보다는 '아, 재밌는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배우들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죠. 설경구는 변성현 감독의 페르소나답게 여기서도 '아무개'라는 이름도 없는 해결사 역할로 나옵니다. 직급도 없고 그냥 일 처리만 하는 인물인데, 그 존재감이 어마어마하더라고요. 홍경은 공군 엘리트 중위로 나오는데 한국어, 영어, 일본어를 다 써야 하는 역할을 정말 자연스럽게 소화했습니다. 류승범은 오랜만에 영화에 복귀한 건데 중앙정보부 부장 역할을 딱 맞게 해냈고요.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일본 배우들이었습니다. 한국 배우가 어설프게 일본어 배워서 하는 것보다 진짜 일본 배우들이 나오니까 훨씬 신선하고 몰입이 잘 되더라고요. <크로우즈 제로>에 나왔던 야마다 타카유키도 나오고, 영화 <괴물>에 나왔던 아역 배우가 좀 자란 모습으로 납치범 중 한 명으로 등장하는데 반가우면서도 연기를 정말 잘하더라고요.
재밌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올해 본 한국 영화 중에서는 단연 상위권에 들 정도로요. 그런데 객관적으로 보자면 아쉬운 지점도 분명 있었어요.
일단 중반 이후로 갈수록 블랙코미디적인 요소들이 좀 예측 가능해집니다. 초반에는 '이 상황에서 이렇게 나온다고?' 싶은 신선함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아, 이제 또 이런 식으로 풀겠구나' 하는 패턴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리고 톤 자체가 가볍다 보니 긴장감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비행기 납치라는 소재인데도 '과연 이 사람들이 무사히 살아날 수 있을까?'보다는 '다음엔 또 어떤 웃긴 상황이 나올까?'에 더 집중하게 되거든요.
스타일리시한 연출이 때로는 서사의 현실감을 압도하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이 주는 투박함보다는 감독의 미학적 취향이 너무 강하게 드러나서, 실화를 다룬다는 무게감이 좀 희석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후반부로 갈수록 인물들의 치밀한 계산보다는 극적인 우연이나 연출된 멋에 기대는 경향도 보였고요.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정말 만족스러운 영화였습니다. 변성현 감독의 모든 작품 중에서 제가 가장 재밌게 본 영화고요. 블랙코미디라는 게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장르이긴 하지만, 넷플릭스에서 부담 없이 볼 수 있으니 한번쯤 시간 내서 보시길 추천합니다. 저는 이 영화 보면서 '감독이 하고 싶은 걸 다 한 영화'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게 정말 좋았거든요. 영화관에서 못 본 게 아쉬울 정도로 완성도 있는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