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넘버원>은 '엄마의 집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라는 숫자를 눈앞에 띄워놓으며, 당연하게 여긴 일상이 사실은 유한하다는 걸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최우식과 장혜진이 <기생충> 이후 다시 모자로 만난 이 작품은, 판타지 설정 속에서도 현실의 따뜻함을 잃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역력합니다.
엄마 집밥에 카운트다운이 생긴다면
주인공 하민(최우식)의 눈에는 엄마가 해준 음식을 먹을 때마다 숫자가 보입니다. 그 숫자가 0이 되면 엄마가 죽는다는 걸 꿈속에서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된 뒤, 하민은 엄마와 거리를 두기 시작합니다. 외식을 핑계 대고, 학교 기숙사로 도망치고, 서울로 올라가 혼자 살며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웁니다.
이 설정 자체는 신선합니다. '부모님과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추상적인 불안을 숫자라는 구체적 이미지로 치환하니, 관객 입장에서도 하민의 조바심이 실감 나게 전달됩니다. 저 역시 명절에 집에 내려갈 때마다 부모님 손에 주름이 늘어난 걸 보며 '앞으로 몇 번이나 이런 밥상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영화는 그 막연한 감정을 시각적으로 명료하게 풀어냈습니다.
다만 이 설정이 후반부로 갈수록 힘을 잃는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숫자의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개연성이 느슨해지고, 갈등 해결 방식이 다소 전형적인 가족 신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지적이죠. 저는 이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영화가 애초에 '놀라운 반전'보다는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에 초점을 맞췄다고 봅니다.
최우식과 장혜진, 다시 모자로
<기생충>에서 기택네 모자로 호흡을 맞췄던 두 배우가 10년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그때는 반지하 빈곤 가정이었다면, 이번엔 평범한 모자 사이의 거리감과 그리움을 담아냅니다. 최우식은 엄마를 사랑하지만 차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청년의 고민을 담백하게 연기하고, 장혜진은 아들의 변화를 눈치채면서도 묵묵히 밥을 짓는 엄마의 모습을 절제된 연기로 보여줍니다.
특히 하민이 엄마의 수술 소식을 듣고 병원에 달려가는 장면에서, 두 배우의 케미가 빛을 발합니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만으로도 관객은 그동안 쌓인 미안함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이 장면에서 제가 무심코 던졌던 "엄마, 나 바빠"라는 말들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일부에서는 연출이 지나치게 눈물을 유도한다는 평도 있습니다. 감정선을 강조하기 위해 음악과 조명을 과하게 사용한 부분이 있다는 거죠. 하지만 제 경험상 이런 가족 영화는 어느 정도 감정적 연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관객이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게 만드는 게 목적이라면, 이 정도 장치는 허용 범위 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판타지와 현실 사이의 균형
<넘버원>은 판타지 설정을 빌려왔지만,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현실적입니다.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더 소중히 대하자"는 메시지죠. 숫자라는 장치는 이 메시지를 관객에게 직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도구일 뿐, 영화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입니다.
다만 판타지와 휴먼 드라마 사이의 균형이 조금 더 정교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숫자의 비밀이 왜 하민에게만 보이는지, 왜 아버지는 그 비밀을 알고 있었는지 등 설정상의 구멍이 있어서, 몰입이 끊기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런 설정 문제를 덮어버리기엔 후반부 전개가 다소 서두른 느낌도 있고요.
그럼에도 저는 이 영화가 "오늘 밤 엄마에게 전화 한 통을 걸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고 봅니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온 뒤 저는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 주말에 내려갈게"라고 말했습니다. 거창한 교훈이나 반전이 아니라, 이런 소소한 행동 변화를 이끌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넘버원>은 2월 11일 개봉했습니다. 숫자라는 장치가 주는 신선함과, 최우식-장혜진의 검증된 연기를 기대한다면 충분히 극장에서 볼 만한 작품입니다. 다만 반전이나 탄탄한 서사를 기대하는 분들에게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으니, 그냥 편안하게 일상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접근하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당연한 것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새겼고, 다음번 집에 내려갔을 때 엄마가 차려주실 밥 한 그릇을 더 소중히 먹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