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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리뷰 (이병헌 연기, 박찬욱 연출, 자본주의 풍자)

by Film Index 2026. 2. 24.

 

회사에서 갑자기 정리해고 통보를 받는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20년 넘게 한 우물 파고, 상까지 받고, 그 회사에 인생을 바쳤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당신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게 무너지는 순간.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저 역시 영화를 보며 제가 직접 겪어보지 못한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과 사회로부터 부정당했을 때의 상실감을 간접적으로나마 강렬하게 체험했습니다.

이병헌이 보여준 평범한 가장의 추락

이병헌이 연기한 유만수는 태양제지에서 20년 넘게 일한 중견 직장인입니다. 미국계 사모펀드가 회사를 인수하면서 구조조정이 시작되고, 만수는 펄프맨상까지 받았음에도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습니다. 영화는 "해고는 도끼질이다"라는 은유를 계속 반복하는데, 실제로 만수의 목을 자르듯 가차없이 잘라냅니다.

3개월간 필사적으로 구직 활동을 하지만 돌아오는 건 구멍뿐입니다. 집을 팔아야 하는 상황까지 몰리자 만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같은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이죠. 알코올 중독자 구범모, 구두 판매원으로 전락한 고시조, 잘나가는 반장 최선출. 이 세 사람 역시 만수처럼 종이밥을 수십 년 먹어온 인생들이지만, 만수는 "당신이 사라져야 내가 산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합니다.

솔직히 이병헌의 연기는 이 영화의 가장 큰 성취입니다. 평소 카리스마 넘치는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면접 때마다 무너지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평범한 아재의 모습을 완벽하게 소화했습니다. 특히 최선출과의 음주 장면에서 보여준 리얼한 만취 연기는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장면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박찬욱 특유의 공간 미학과 블랙코미디

박찬욱 감독은 건축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공간 연출에 특히 강점을 보입니다. 이번 영화에서도 세 남자의 저택은 각각 중년 남자의 로망, 고립, 억눌림, 비밀, 과시욕을 담고 있습니다. 만수의 집은 어린 시절부터 살던 곳을 직접 사서 손본 공간인데, 이곳이 결국 진실이 폭로되는 극적 종착점이 됩니다.

제가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구범모 내외와 총을 두고 벌이는 몸싸움 장면입니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구성과 큰 볼륨에 맞춰 연출된 이 장면은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처절한 생존 투쟁을 담고 있습니다. 고시조와의 대화 장면 역시 따뜻했던 가장 만수와 악으로 변한 만수의 양면을 동시에 드러내며 묘한 불편함을 줍니다.

영화는 "어쩔 수가 없다"는 제목을 계속 반복합니다. 미국 본사도 해고를 통보하며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고, 만수도 살인을 앞두고 스스로를 세뇌하듯 주문을 반복하고, 새로운 고용주 역시 AI 자동화 시스템 도입을 정당화하면서 같은 말을 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건 '어쩔 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할 수도 있었고, 아내의 조언처럼 다른 업종으로 전환할 수도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든 비극적 초상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9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은 이 영화는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1997년 소설 '더 액스'를 현대적 맥락에 맞게 각색한 작품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경미, 돈 맥클로, 이자애와 함께 각본을 쓰며 한국 사회의 구조조정 현실을 날카롭게 담아냈습니다.

영화는 묻습니다. 만수가 바랐던 삶의 형태를 얻기 위해 개처럼 날뛰며 사람들을 파묻은 게 과연 가치 있는 삶인가라고 말입니다. 마지막 면접 자리에서 만수는 "적어도 한 명 정도는 필요하지 않냐"라고 말하며 결국 그 자리를 꿰찹니다. 하지만 로봇이 종이를 옮기는 불 꺼져가는 공장에서 "이젠 됐다"며 쾌재를 부르는 그 장면이 뼈 아프게 슬픈 건,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살면서 "어쩔 수 없었어"라는 핑계 뒤에 숨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생존이라는 명목하에 나 자신의 도덕성을 조금씩 깎아 먹으며 타협했던 순간들이 이 영화를 보며 아프게 되살아났습니다. 주인공의 광기가 단순히 영화적 상상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숨겨진 본능적인 이기심을 건드렸기 때문에, 영화가 끝난 뒤에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손예진이 연기한 아내 미리는 이 영화의 정서적 닻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직시하고 있고, 닥친 상황을 활용하는 현실주의적 면모도 있으며, 가족들의 운명을 조율하며 실질적인 결단을 내립니다. 박희순, 이성민, 차승원 등 조연진도 빼어납니다. 잔혹한 시스템의 희생양인 이들은 각자의 기구한 면모를 순간적으로 드러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퇴장합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학적 과잉이 서사의 개연성보다 앞서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주인공의 범죄 행각이 지나치게 연극적으로 묘사되면서, 그가 처한 현실적 비극에 온전히 몰입하기보다는 감독의 정교한 연출력을 감상하는 기분이 더 강하게 든 것도 사실입니다. 중반 이후의 전개가 다소 반복적인 패턴에 갇혀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신없이 즐기고 난 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복잡한 마음이 들었던 영화였습니다. 영화 속 비유와 은유들을 아무리 씹어도 물과 단물이 나오는, 돈값을 충분히 해내는 어둡고 기묘한 희극이었습니다. 노동자를 수십 년간 삼켰다가 한순간에 내뱉는 잔인한 시스템을 고발하고, AI와 자동화라는 현대적 공포를 겹쳐 코미디의 외피 속 비극적 통찰로 담아낸 이 작품은, 박찬욱의 전성기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증명 같은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77Yes279dV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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