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헌과 유아인이 바둑판 위에서 펼치는 치열한 승부극. 영화 <승부>는 한국 바둑의 전설 조훈현 9단과 그의 제자 이창호의 관계를 다룬 작품입니다. 정점에 선 스승과 그를 넘어서야 하는 제자의 고독한 싸움을 담아냈죠. 저는 바둑을 거의 모르는 사람이지만, 이 영화를 보며 '정점에 선 이들이 느끼는 고독함'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조훈현이라는 바둑 황제의 등장
1988년 싱가포르, 제1회 응창기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결승. 당시 한국 바둑의 독보적 존재였던 조훈현 9단이 중국의 섭위평 9단과 마지막 대국을 벌였습니다. 세계 바둑계를 일본과 중국이 양분하던 시절, 한국 바둑은 아직 변방이었죠.
조훈현은 장미 연초를 피워물며 대국에 임했습니다. 산소 마스크를 쓴 상대와 달리, 그는 여유로워 보였지만 속은 필사적이었죠. 흑백을 가리는 과정에서 그는 불리한 흑을 잡았고, 응창기배의 특이한 룰에 따라 더욱 힘든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승리. 한국 바둑이 세계 최정상에 올랐다는 증거였습니다.
영화는 이 승리 이후 조훈현이 한 소년을 만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전주의 바둑 신동, 반년도 배우지 않았다는 그 아이는 프로 기사와 목점 대국에서 승리할 정도였죠. 조훈현은 그 아이, 이창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스승과 제자, 그 미묘한 경계
조훈현이 전주까지 내려가 이창호를 다시 만났을 때, 소년은 당돌하게도 "한 판 더 두자"고 요구했습니다. 석점 바둑에서 조훈현을 이긴 창호는 "세상 돌아가는 거 하나도 모르네"라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끝내 승리를 거뒀죠. 저는 이 장면에서 천재가 또 다른 천재를 만났을 때의 묘한 긴장감을 느꼈습니다.
서울로 데려온 창호는 기원의 형들을 상대로 다면기를 두며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조훈현의 가르침은 냉혹했습니다. "승패가 다가 아니야. 상대를 존중하는 법부터 배워." 유리한 바둑을 설렁설렁 두는 창호에게 기본과 예의를 강조한 거죠.
정석 연습, 체력 훈련, 심지어 오른손으로 바둑을 두는 것까지. 조훈현은 창호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너 지금 바둑 흉내만 내고 있다"며 기본을 다지게 했습니다. 제가 사회 초년생을 준비하며 느끼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재능만으로는 부족하고, 기본과 태도가 먼저라는 걸요.
천재를 넘어서는 천재의 고통
영화의 중후반부는 조훈현이 제자 이창호에게 연달아 패배하며 겪는 딜레마를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바둑판 위에서는 죽일 듯이 싸우지만, 한 집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스승과 제자. 이 미묘하고 불편한 심리를 이병헌과 유아인이 절제된 연기로 표현했죠.
조훈현의 시대가 저물고 이창호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 스승으로서는 자랑스럽지만, 승부사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저는 이 부분에서 정점에 선 이들이 느끼는 고독함을 간접적으로 체험했습니다. 아직 사회에 첫발도 내딛지 못한 제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경지였지만, 영화는 그 무게를 충분히 전달했습니다.
영화는 조훈현의 내면에 몰아치는 경랑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바둑판 위의 아슬아슬한 재미보다는 승부 결과가 두 사람에게 남긴 상처와 성장을 그렸죠. 바둑을 모르는 관객을 배려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게 오히려 영화를 더 보편적으로 만들었다고 봅니다.
승부사의 태도, 그리고 시대의 교체
영화 <승부>가 훌륭한 지점은 바둑이라는 소재를 넘어 '시대의 교체'를 다뤘다는 점입니다. 조훈현은 일본 바둑계에 맞서 실용적이고 승부 지향적인 스타일로 한국 바둑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창호의 바둑을 이해하지 못했죠. 다만 그 다음을 보고 싶어 할 뿐이었습니다.
이병헌의 연기는 영화의 척추였습니다. 유머, 당혹감, 호기로움, 달관이 담긴 그의 표정 하나하나가 조훈현이라는 인물을 살아있게 만들었죠. 유아인 역시 천재 특유의 순수함과 냉철함을 동시에 표현하며 이창호를 완성했습니다.
다만 바둑을 모르는 관객을 배려하다 보니 고수들 간의 치밀한 수 읽기가 생략된 점은 아쉬웠습니다. 일부는 과장된 효과음이나 극적인 편집이 바둑의 정적인 매력을 해친다고 평가하기도 했죠. 저 역시 승부 과정의 세밀함보다는 결과에 집중한 연출이 호불호를 가를 수 있다고 봅니다.
영화 <승부>는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승부에 임하는 태도'임을 가르쳐줬습니다. 정점에 선 이들의 고독과 책임, 그리고 시대를 넘겨주는 순간의 무게를 담아낸 작품이죠. 저처럼 바둑을 모르는 사람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극장에서 직접 확인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