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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얼굴 (박정민 연기, 정체성 질문, 연상호 감독)

by Film Index 2026. 2. 24.

 

누군가 제게 "당신을 정의하는 건 뭔가요?"라고 물으면 저는 한참을 고민하게 됩니다. 학력? 직업? 외모? 그것도 아니면 성격?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하다고 믿지만, 제 경험상 그건 생각보다 훨씬 취약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기준 앞에서 말입니다. 박정민 주연의 영화 <얼굴>은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듭니다.

영화는 40년 전 실종된 어머니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됩니다. 시각장애인 정각 장인인 아버지와 그의 아들 동안은 평생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 서게 되죠. 장례식장에 나타난 건 유산을 노리는 이모들뿐, 어머니에 대한 단 한 장의 사진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박정민이 보여준 1인 2역의 깊이

박정민 배우의 연기는 정말 압도적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1인 2역이라고 하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단순한 교차 편집을 떠올리기 쉬운데, 제가 실제로 스크린에서 본 건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현재의 시각장애인 정각 장인과 과거의 젊은 동안을 완벽히 분리해냅니다. 목소리 톤, 손동작, 심지어 숨쉬는 방식까지 달라집니다. 특히 시각장애인 캐릭터를 연기할 때 보여준 섬세함은 놀라웠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공간을 인지하는 방식, 상대방의 존재를 감지하는 미세한 움직임들이 전부 다르더군요.

솔직히 저는 초반 10분 동안 이게 같은 배우인지 의심했습니다. 과거 회상 장면에서 젊은 동안이 어머니의 진실을 추적할 때의 절박함과, 현재 늙은 장인이 보여주는 체념 섞인 침착함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거든요.

얼굴 없는 어머니가 던지는 정체성의 질문

영화의 핵심은 '얼굴'입니다. 동안의 어머니 정영희는 평생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못생겨서" 사진 찍기를 싫어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과거를 파헤칠수록 드러나는 건 외모에 대한 편견과 차별,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범죄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미스터리 영화는 "누가 범인인가"에 집중하지만, <얼굴>은 "왜 그녀는 사진을 남기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왜 그녀의 외모만 기억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제 경험상 이런 질문이 훨씬 더 오래 남더군요.

40년 전 피복 공장에서 일하던 정영희의 과거가 하나씩 밝혀지면서, 우리는 선량했던 한 여성이 어떻게 세상의 악의에 희생당했는지 목격합니다. 그녀가 동료 진숙을 지키려다 사장 백주상과 충돌했던 장면, 침묵하지 않고 진실을 기록하려 했던 장면들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연상호 감독 특유의 인간 내면 해부

연상호 감독의 초기 작품들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얼굴>에서 그 DNA를 확실히 느끼실 겁니다. 저 역시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 같은 작품에서 봤던 그 날카로운 시선이 여기에도 그대로 담겨 있다고 느꼈습니다.

감독은 인간 내면의 추악함을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유산을 노리는 이모들, 과거의 범죄를 덮으려는 가해자, 피해자의 외모만 기억하는 증인들. 이들은 전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게 더 무섭죠.

특히 늙어버린 백주상이 여전히 피해자의 외모를 흉보는 장면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악의,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무심하게 타인의 존재를 지워버리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강렬하게 남는 영화

다만 아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영화가 던지는 철학적 질문들이 때때로 인물의 대사를 통해 너무 직접적으로 전달됩니다. "이게 아름다운 건가요, 추한 건가요?" 같은 대사는 관객이 스스로 느끼고 판단할 여지를 주기보다는 메시지를 주입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한 후반부로 갈수록 미스터리 장르의 전형적인 전개 방식에 기대는 모습도 보입니다. 초반에 쌓아 올린 묵직한 질문들이 후반부의 자극적인 반전과 추격 구도 속에서 다소 흩어지는 느낌을 받았죠. 제 생각엔 좀 더 절제된 마무리가 영화의 주제를 더 강화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얼굴>은 올해 본 한국 영화 중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작품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며 "보이는 얼굴 너머에 진짜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하게 만드는 영화는 흔치 않습니다. 박정민의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극장에서 볼 가치가 있고, 연상호 감독이 한국형 미스터리에 새로운 깊이를 더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엔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점은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HSm7fvMHe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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