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어떤 내용인지 정확히 모르고 들어간 영화였는데, 극장을 나올 때는 생각보다 오래 먹먹했습니다. 단종이라는 비운의 왕과 그 곁을 지킨 촌장 엄흥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화려한 반전이나 극적인 장면 대신 현실의 무게를 그대로 담아냈습니다.
단종, 무기력한 소년에서 왕으로
영화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이후 피로 얼룩진 궁궐에서 시작합니다. 신하들이 하나둘 죽어가는 와중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소년 단종의 모습은 정말 처연합니다. 권력을 잃은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밥을 거부하는 것뿐이었죠.
청령포로 유배 온 단종은 처음엔 얼굴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광천골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차려준 밥을 통해 서서히 마음을 열어갑니다. 밥 한 끼가 생존의 문제인 사람들에게, 따뜻한 쌀밥을 거부하는 단종의 모습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욕하기보다 안쓰러워했고, 이런 온기가 단종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었습니다.
호랑이 사건 이후 단종의 변화는 확실히 급격합니다. 자신을 찾아 헤매던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는 호랑이를 단번에 쓰러뜨린 순간, 무기력했던 소년은 사라지고 백성을 지키려는 왕의 눈빛이 나타납니다. 다만 이 변화가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처럼 보여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밤사이 고뇌하는 시간을 좀 더 보여줬다면 감정의 흐름이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흥도와 한명회, 선택의 무게
촌장 엄흥도는 권력 같은 건 관심 없습니다. 그저 마을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원하죠. 옆 마을이 형조 판서 덕분에 잘 산다는 소식을 듣고 청령포를 유배지로 유치하려 했지만, 정작 온 사람은 권세가가 아닌 슬픈 눈을 가진 소년이었습니다.
단종과 정을 나눈 엄흥도가 한명회의 위협 앞에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장면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픕니다. 실제로 영화를 볼 때 저도 이 부분에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무능력한 자신을 탓하며 돌아서야 하는 단종의 눈빛은 정말 처연했죠.
한명회는 단종의 성장을 감지하고 불안해합니다. "새싹은 자라기 전에 밟아야 한다"는 그의 철칙대로, 변화한 단종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겁니다. 유지태 배우가 보여준 한명회의 묵직한 카리스마와 의도적인 도발은 정말 일품이었습니다.
청령포, 아름다워서 더 슬픈 곳
단종이 죽음을 맞이하는 날, 청령포는 유난히 아름답습니다. 햇빛마저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더 슬펐죠. 단종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마을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때도 청령포는 아름답게 그려졌습니다. 아름다움과 슬픔이 공존하는 이 장소의 이미지는 영화 내내 강렬하게 남았습니다.
엄흥도의 "다 왔습니다"라는 말은 지금 생각해도 울컥합니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지 말라는 명을 어기고 그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의 선택은,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눈치보지 않고 소신을 선택했죠.
영화는 생각보다 짧았고, 극적인 반전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단종의 슬픈 역사를 사람의 마음으로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다이나믹한 전개를 원하는 분에게는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실제 역사에 기반한 이야기라 생각하면 더 먹먹합니다. 배우들의 연기 덕분에 역사에 몰입할 수 있었고, 평범한 일상들이 슬픔을 극대화시키며 인물들 간의 관계에 더욱 공감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번쯤은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