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못생긴 여자가 주인공인 로맨스 영화가 성공할 수 있을까요?" 박민규 작가는 2008년 이 도발적인 질문을 소설로 던졌고, 2026년 2월 넷플릭스는 영화 <파반느>로 답을 내놓았습니다. 원작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은 저로서는, 이 영화가 과연 소설의 핵심을 살려낼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상보다 괜찮았지만, 동시에 피할 수 없었던 아쉬움도 분명했습니다.
원작과 영화, 게으른 캐스팅의 딜레마
일반적으로 원작 팬들은 영화화에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갖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파반느>의 캐스팅은 그 우려를 현실로 만든 케이스였습니다. 특히 요한 역의 변요한은 캐릭터 이름이 '요한'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택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게으른 선택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종필 감독이 이전 작품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호흡을 맞춘 고화성을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작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설정은 여주인공이 '못생겼다'는 점입니다. 작가는 후기에서 "아마도 이것은 못생긴 여자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다룬 최초의 소설이 될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적어두었습니다. 소설 전체에서 '못생겼다'는 단어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외모 지상주의 사회에서 못생긴 여성이 겪는 소외와 고통이 거침없이 묘사됩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고화성이 여주인공을 연기합니다. 10kg 증량을 했다고 하지만, 샤를리즈 테론이 <몬스터>를 위해 20kg을 찐 것과 비교하면 티도 나지 않는 수준입니다. 영화에서 '못생겼다'는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얼굴이 좀 그래", "얼굴이 아쉽다" 같은 애매한 돌려말하기만 나올 뿐입니다. 설정을 바꾼 것도 아니고 안 바꾼 것도 아닌, 눈가리고 아옹하는 식입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관객들이 스스로 고화성을 못생겼다고 '생각하면서' 봐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마치 <쉬즈 더 맨>에서 여자 주인공이 남장을 하면 쌍둥이 오빠와 똑같이 생겼다는 설정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처럼요.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그런 노력조차 포기합니다.
2000년대 감성의 충실한 재현
일반적으로 로맨스 소설은 사건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파반느> 원작은 사건보다 분위기와 철학적 사유가 중심입니다. 5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실제로 많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습니다. 대신 물질만능주의, 외모지상주의, 인간의 속물성에 대한 1인칭 주인공의 독백이 길게 이어집니다.
이 소설은 전형적인 86세대, 그것도 2000년대 하루키 열풍 시절의 감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늘 카뮈나 카프카를 읽고 있고, 요한과의 만남은 거의 <노르웨이의 숲> 오마주 수준입니다. 영화는 이 감성에 2000년대 조재현 감독 스타일까지 블렌딩했습니다. 남주가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갖는 장면이나 길거리에 주저앉아 우는 장면은 완전히 조재현 영화 문법 그대로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오히려 흥미로웠습니다. 2000년대를 관통했던 문화적 코드들을 2026년에 다시 꺼내 보는 경험이랄까요. 세 주인공은 각자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남주의 아버지는 배우로 성공한 뒤 가족을 버렸고, 요한의 어머니는 백화점 회장의 정부였다가 버림받고 자살했습니다. 여주는 못생긴 외모 때문에 평생 소외당하며 살았습니다.
영화는 이들이 백화점에서 만나 우정을 쌓고, 남주와 여주가 사랑에 빠지지만 여주가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립니다. 남주가 여주의 본가 주소를 알아내 편지를 보내고, 둘이 다시 만나는 장면까지는 원작과 거의 동일합니다.
반전 엔딩, 그리고 함께함의 의미
일반적으로 원작 팬들은 영화 각색에서 엔딩 변경을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파반느>의 엔딩은 원작과 다르면서도 그 정신을 잘 살렸다고 생각합니다.
원작 소설의 가장 큰 충격은 이야기 전체가 요한이 쓴 소설이었다는 반전입니다. 남주는 버스 사고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다가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죽었고, 요한이 자살 시도를 했다는 내용도 허구였습니다. 실제로는 요한과 여주가 일본 홋카이도 오타루로 가서 결혼해 딸까지 낳고 살아가는데,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의 상처를 나누며 함께 살아갑니다.
소설의 마지막 챕터는 죽은 남주의 시점이 다시 등장합니다. 여주와 함께 여행하는 장면이 나오며, 남주는 죽었지만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남주의 존재가 요한과 여주 안에 남아 있고, 그래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영화는 이 복잡한 구조를 단순화했습니다. 요한과 여주가 결혼했다는 설정은 빼고, 대신 두 사람이 여전히 친하게 지내며 각자 인생을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인디언 복장의 남주가 기다리고 있고, 여주와 요한이 와서 셋이 함께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저는 이 엔딩이 정말 좋았습니다. 슬픈 내용이지만 전혀 슬프지 않은, 밝은 분위기의 마무리였습니다.
2025년 말에 나온 양장 특별판에는 11페이지 분량의 추가 내용이 있습니다. 저는 서점에서 서서 다 읽었는데, 작가로 추정되는 화자가 일본에 사는 요한과 여주를 만나러 가는 장면입니다. 남주가 죽었지만 작품 안에서는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는 의미를 강화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솔직히 이 영화가 대중적으로 성공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원작을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의 반응 차이가 클 것이고, 고화성 캐스팅에 대한 논란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영화화하기 쉽지 않은 소설을 상당히 괜찮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세 배우의 연기와 케미는 흠잡을 데 없었고, 원작의 서정적 매력을 시각적으로 잘 살렸습니다. 제가 느낀 가장 큰 위로는 '나조차 외면했던 평범함이 누군가에게는 유일한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였습니다.